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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여섯 번째 이야기로 독일에 있는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라인 강에서 뻗어 나온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있습니다.
이미 황태자의 사랑이란 영화로 하이델베르크의 고성과 구시가지는 유명합니다.
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유명한데요. 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어서 대학도시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 관광지로 잘 알려진 관광도시이기도 합니다. 
인구는 16만 정도 아주 작은 도시이지만 도시 자체가 대학도시여서 주로 대학생, 교수 등 학계 분야 인구 비중이 높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인구가 작은 도시이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습니다.
그럼 하이델베르크가 가지고 있는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이델베르크 역사

 

하이델베르크에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하이델베르크 조상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B.C. 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켈트족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유골의 발견으로 하이델베르크 도시에 처음으로 살았던 조상은 신생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각각으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200만~60만년 전 사이로 추정됩니다. 
하이델베르크는 B.C. 1세기 때 이서 지방이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하이델베르크 일대에 로마군의 주둔지로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이 쇠퇴한 3세기 이후 이에 하이델베르크는 다시 게르만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이델베르크라는 지명은 언제 처음 불리어졌을까요?


하이델베르크라는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중세시대 12세기 때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역사서에는 베르크하임(Bergheim)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다가 가톨릭 수도원들이 이 일대에 만들어지고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386년에는 팔츠 선제후였던 루프레히트 1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짓기 시작하면서 이 도시는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겪으면서 그 당시 독일 문화권 지성인 단체의 총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17~18세기 끊임없는 전란으로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1622년에는 30년 전쟁 중에 두어 달 동안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계 군사들의 포위전으로 하이델베르크는 점령당해서 일시적으로 하이델베르크는 팔츠가 아니라 바이에른의 통치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도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에는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 시기 발간된 수많은 서적들을 보관하 어 있었으나, 틸리 백작이 이 문서들을 빼앗고 바티칸으로 가져갔습니다. 
1634년 스웨덴군이 하이델베르크를 침공하자 가톨릭 측은 하이델베르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으나 같은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프랑스가 배신을 하면서 스웨덴군을 지원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하이델베르크 도시는 다시 팔츠 선제후의 통치권으로 돌아왔지만,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발생되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팔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9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팔츠 선제후였던 카를 루트비히 1세는 자신의 딸을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에게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지메른 분가의 대가 끊기자 루이 14세가 이 혼인을 근거로 팔츠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의 위협으로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은 뒤셀도르프로 피난했고, 1693년 하이델베르크는 결국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한편 수많은 전쟁으로 심신에 지친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지역 일대 주민은 영국을 거쳐 신대륙으로 이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펜실베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를 개척한 선구자입니다.

그 이후 1803년 하이델베르크는 바덴 대공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위력을 힘입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하이델베르크는 자유주의의 천국과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1848년 혁명 당시에는 혁명세력의 중심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혁명이 결국 무너지면서 프로이센 군이 하이델베르크를 잠깐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점이 있는데 1815년 혁명 이념을 없애기로 결의하면서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이 여기 하이델베르크 도시에서 맺어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아주 작은 소규모 도시여서 다른 제국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는데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위력으로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치 독일 시기는 하이델베르크에게 있어 암흑시대였습니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많은 비 아리아(주로 유대인) 출신 사람들은 해고당했으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과 슈츠 슈 타펠을 위한 시설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도시는 다른 대도시처럼 크지가 않아 산업이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2차 대전 중에는 연합국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막사나 포로 수용소로 쓰려고 일부러 폭격을 안 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 경우 이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남겨 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45년 3월 30일에 미군이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했습니다.
그 이후 2011년까지 하이델베르크는 주독미군의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미군은 2011년 이후로 2013년까지 2년에 걸쳐 비스바덴으로 미군기지를 옮겼습니다.


3. 하이델베르크의 볼거리와 문화


하이델베르크 도시는 뮤지컬 황태자의 첫사랑 'The Student Prince' 배경이 된 장소입니다.
황태자의 첫사랑은 독일 어느 조그마한 성에서 이 도시로 유학 온 왕자가 현지인 바걸과 사랑에 빠진다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독일 연극으로도 각색되고 1924년 미국에서 제일 처음 상연되었습니다.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로는 1954년 만들어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도시의 명소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고성, Heidelberg old bridge, 철학자의 길, 하이델베르크 구시지지 메인 스트리트, Brass Monkey Statue, 학생 감옥, 넥카강, 대학광장 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이델베르크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럼 오늘은 독일 학문의 중심지 하이델베르크에 대해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다음 번 도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랑잠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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